전체상품목록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술-이야기

  • 크리스마스 in 술다방 -下-

    #크리스마스 #칵테일 #술다방



    크리스마스 in 술다방 --







    #크리스마스 #한정판칵테일 #술다방 #을지로





    편에서 이어서 -



    바텐더는 갑자기 통 하나를 꺼내더니 안에 든 하얀 물질에 토치를 가져다 댔다. 갑자기 고소한 버터 향 같은 것이 바 안에 퍼졌다.




    “이게 뭐에요...?”

    “곧 아시게 될 거에요”

    바텐더는 싱긋 웃으며 녹아내린 액체를 마티니 글라스 안에 붓고 골고루 흔들었다. 가만히 보니 글라스 속 액체는 조금씩 하얗게 굳어갔고 얼룩처럼 빨간 시럽이 대리석 같은 무늬를 이루고 있다. 잠시 후 그는 조그만 아로마 병 같은 것을 꺼내더니 손등에 문지르고 우리에게 향을 맡아 보라고 한다.


    “이거 꼭...은은한 소나무 향 같아요.”

    “네, 맞아요. 이건 앙고스트라 비터라고 원래 약용으로 쓰던 리큐르인데 여러 가지 약초가 들어가 나무 향이 나죠.”


    하얗고 빨간 ‘마블링(?)’이 만들어진 글라스 안에는 노르스름한 술이 먼저 부어졌다.


    “칵테일 베이스는 죽력고예요. 대나무즙에 댓잎과 각종 향료를 넣은 전통주인데 조선시대에 3대 명주로도 꼽혔던 유명한 술입니다. 여기에 엘더 플라워 리큐어와 오미자청을 넣으면 완성이에요.”

     




    “너무 예쁘다~!”


    완성된 칵테일을 보고 동생은 탄성을 질렀다. 조심스럽게 향을 맡으니 익숙한 냄새가 난다.


    “이거, 코코넛이네요?”

    “네 맞아요. 아까 보여드린 기법은 리밍이라고 코코넛 오일을 잔에 발라 무늬를 낸 거에요. 빨간 빛깔은 그레나딘 시럽이구요. 죽력고 베이스도 그렇고 앙고스트라 비터, 엘더플라워를 넣어서 크리스마스 트리 이미지를 형상화했어요.”


    한 입 조심스럽게 맛보자 은은한 코코넛 향에 뒤이어 석류의 새콤함이 코를 찌른다. 술을 즐기지 않는 동생이지만 이런 맛이라면 좋아할 듯 싶다.


    “언니, 이거 옛날에 언니가 남친 준다고 만든 과자 있지? 그거랑 비슷한 맛이 나.”

    “아... 코코넛 로셰?”


    크리스마스에 뭔가 특별한 선물을 한다고 처음으로 도전한 베이킹이 바로 코코넛에 달걀 흰자를 넣어 반죽한 코코넛 로셰 쿠키였다. 그날 남친은 향이 이상하다며 한두 개를 먹고 말았고 속상했던 나는 과자를 동생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 술, 아빠가 만들었던 트리랑 비슷한 느낌이 들어. 나무 향이라 해서 이상할 줄 알았는데 자연스럽게 넘어가네...달콤하고, 고소하고, 새콤한 맛이 다 들어 있어.”


    크리스마스는커녕 결혼기념일도 제대로 안 챙기던 아버지가 우리에게 해 주던 몇 안 되는 연례행사가 바로 직접 작은 소나무나 노간주나무 분재를 사와 직접 해주신 트리였다. 노간주나무의 빨간 열매를 보면 아무 장식을 하지 않았는데도 크리스마스 기분이 났다. 문득 어린 시절 동생과 트리 앞에서 선물을 풀어보며 즐거워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너랑 나랑...그땐 토닥거리면서도 친했는데...지금은 왜 이렇게 서먹해졌을까..?”

    “...아직 안 늦었어, 언니..”


    묘한 동생의 웃음이 스치며 다시 눈이 떠졌다. 이른 아침인 듯 한데 바깥에는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잠시 멍해진 나는 일어나 주변을 정리하고 동생에게 카톡을 보냈다.


    “박은혜, 언제 오는지 미리 얘기해. 데리러 나갈게...”


    창문을 열었다. 코코넛 가루처럼 새하얀 눈이 기분좋게 공중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2018년 12월 26일 을지로 일대


    이틀 연속 이상한 꿈을 꾸었던 탓일까? 눈 오는 날이면 꼼짝하기 싫어지는 나이지만 오늘은 밖으로 나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참에 인쇄 상태나 체크하고 올까?’


    사실 내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지만 딱히 밖으로 나갈 핑계거리가 떠오르질 않았다. 주섬주섬 샤워를 하고 외출 준비를 했다. 코트를 입고 얼마 전 새로 산 부츠를 신으려는데 카톡이 왔다. 고지연이다.


    “팀장님! 오늘 쉬시죠? 저랑 놀아주세요!”


    아니 다낭에 놀러간다고 잔뜩 들떴던 녀석이 왠일로...?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려는데 다시 톡이 온다.


    “어제 남친하고 대판 싸우고 열 받아서 밤비행기로 돌아와 버렸어요. 오늘 집에 있긴 싫은데 만날 사람도 없어요..ㅠ .ㅠ”


    뭔가 안습한 상황이다. 나는 재빨리 답문을 보냈다.


    “이 사람아, 한창 젊은 나이에 같이 놀 친구도 없어?”

    “아시잖아요, 팀장님. 저 예전부터 여자 친구 없었던 거...”


    하긴 입사 때부터 왠지 얄미운 구석이 있었던 지연은 동성 친구와 어딘가 놀러 간다거나 식사를 하거나 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솔직히 살갑게 대하고 싶은 후배는 아니었지만 오늘 같은 날은 뭐 괜찮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 을지로 인쇄소 체크하러 가니까 심심하면 따라오던가.”

    “정말요, 팀장님? 지금 나가요!”


    나는 짧게 한숨을 쉬고 밖으로 나왔다. 눈발은 아까보다 잦아들어 있었다. 길도 미끄럽지 않고 뽀송한 감촉에 기분이 좋아졌다. 지하철을 타고 인쇄소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길가를 걸었다. 간단히 인쇄 상태를 살펴보고 별다른 이상이 없어 돌아가려는데 문득 2층 건물 희미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이 시간에 왠 캬바레?’싶은 생각이 들어 고개를 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빨간 불빛이 흘러나오지만 캬바레는 아니고 옛날식 다방인 모양이다.


    ‘요즘도 이런 다방이 남아 있구나..’


    나는 별 생각 없이 그 장소를 지나치려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작은 노란 표지판에 ‘술다방’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나는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세상에...두 번이나 꿈에 나타났던 바로 그 공간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게다가 나에게 칵테일을 만들어 준 청년 바텐더도 그 자리에서 부지런히 컵을 닦으며 장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눈을 몇 번 감았다 떴다. 꿈은 아닌 거 같다. 나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여기...영업 하는거에요?”


    바텐더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틀림없는 꿈속의 그 남자다.


    “물론이죠. 저희 얼마 전부터 낮술 타임이 생겨서 오후 2시부터 시작합니다.”

    “아...앉아도 될까요...?”

    “어서 오세요. 일행은 있으신가요?”

    “...네. 곧 올거에요.”


    나는 다시 꿈속에서처럼 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고소한 인절미를 연상시키는 과자가 눈앞에 놓였다.


    “혹시 일행 분 금방 안 오시면 서비스로 한잔 드릴까요?”

    “네...부탁드립니다.”

    “오늘쯤 오시는 손님들은 크리스마스 때 과음하신 분들이 좀 있더라구요. 상큼하니 기분전환에 좋은 칵테일은 어떨까요?”

    “좋아요!”


    나는 조심스레 과자를 씹으며 바텐더의 얼굴을 살폈다. 꿈 속 남자와 닮았지만 왠지 다른 듯도 보인다.




    곧 튤립 모양의 잔에 칵테일이 담겼다. 연한 초록색에 파인애플 장식이 된 것이 열대가 연상되는 비주얼이다. 한 입 맛보니 파인애플과 레몬, 멜론맛이 섞인 트로피컬 주스 같은 달콤함이 입안을 감쌌다.


    “이 칵테일의 베이스는 이강주에요. 배, 생강, 계피향이 나서 해장술로 좋다는 분들도 계시구요. 여기에 여성분들 취향에 맞춰서 과일주스와 리큐어, 탄산이 들어간 토닉워터를 섞었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모금을 다시 마셨다. 순간 어제의 두 칵테일 맛도 새삼 떠올랐다. 크리스마스에 기억나는 많은 것들 중 처음에 나는 첫사랑을, 두 번 째 날에는 가족을 만났다. 그럼 세 번째는...?


    술맛에 온 정신을 기울이고 있는데 다시 카톡이 울린다.


    “팀장님, 저 을지로 근처에요. 어디로 찾아가면 돼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답톡을 하려는데 다시 다른 알림이 떴다. 서과장님이다.


    “은주씨, 미안한데 혹시 시간 괜찮아? 친정 부모님 애들 데리고 시골 가셨고 신랑은 또 외박한대. 모처럼 자유시간이 생겼는데 갈 데가 없어...”


    문득 웃음이 났다. 그리고 방금 전 떠올리려 했던 세 번째 존재가 바로 이들임을 알게 됐다. 나는 두 사람에게 술다방의 위치를 전하고 같은 칵테일 두 잔을 추가로 주문했다. 크리스마스 다음날 여자 셋이 낮술이라니, 남들한테는 없어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활력 충전의 시간이 될 듯하다.
























      정세진 anais21@hanmail.net

       술 권하는 유목민.

       낯선 문화, 낯선 술을 찾아 헤매는 농경사회 노마드로 살아가고픈.


  • 크리스마스 in 술다방 -上-

    #크리스마스 #칵테일 #술다방



    크리스마스 in 술다방 -上-







    #크리스마스 #한정판칵테일 #술다방 #을지로





    2018년 12월 24일 오전, 서울 마포구의 한 잡지사 사무실


    “자, 여러분...오탈자 없나 다들 체크 했죠? 마지막으로 점검 끝나시면 인쇄소로 갑니다.”

    “야~신난다! 이제 올해 마지막 호도 마쳤네요.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사무실 막내 고지연이 씩씩하게 외쳤지만 왠지 다들 기운은 없어 보인다. 하긴 특집기사 인터뷰가 지연되는 바람에 거의 3일 밤을 샌 후니 그럴 만도 했다. 어쨌든 상황이 대충 종료된 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하나하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팀장님은 이번 크리스마스 때 뭐하세요? 전 남친하고 베트남 다낭에 가기로 했는데. 오늘 밤 비행기 타요”

    “지연씨는 젊어서 좋겠네. 우리야 뭐 집에서 쉬는 거지. 서 과장님은 애들하고 놀아줘야 하고.”


    3 살배기 아들을 어린이집에, 돌잡이 딸을 친정에 맡기고 온 서과장은 다른 누구보다 귀가를 서두르는 분위기다. 나 박팀장, 박은주는 침침한 눈에 인공눈물을 한두 방울 떨어뜨리며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맨날 라이프 스타일, 여행 기사 쓰면서 정작 우리는 월차 한번 내기 힘들고... 수당 필요 없다고 대표님한테 못 박아놨으니 난 26일까지 푹 쉴 거야.”  


    몸은 지쳐 있지만 사실 속으로는 신이 났다. 퇴근 후, ‘그곳’에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모처럼 마감 스트레스를 푸는 나만의 휴식 공간 말이다.


    “근데 쉬신다는 분 치고는 어째 쌩쌩해 보이네요.”

    왠지 뜨끔해진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재빨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이날을 위해 일부러 차도 놓고 온지라 곧장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오늘은 뭐가 나올까....크리스마스니 뭔가 특별메뉴가?’

    전철을 타고 세 정거장을 가면서 들뜬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벌써부터 북적이는 인파를 헤치고, 나는 항상 지나가던 길을 지나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OO키친을 사랑해주시는 고객 여러분께 죄송한 말씀 올립니다. 금년도 최저임금 인상과 건물 임대료 상승으로 인해 더 이상 영업이 어렵게 됐습니다. 언젠가 다시 찾아뵐 수 있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사장의 사과문은 꽤나 길었으나 나는 더 이상 읽을 기운이 나지 않았다. 아놔, 나만의 유일한 힐링 공간이 사라지다니... 망할 건물주, 망할 최저임금....속으로 온갖 욕이 나왔다. 고객이 아니라 맛집 기자의 입장에서도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는 건 여러 모로 힘이 빠지는 일이다. 뱃속에선 꼬르륵~ 소리가 밀려왔다. 편의점이라도 들를까 했지만 일단은 좀 쉬어야겠다 싶어 집으로 향했다.    

       

    10평이 채 되지 않는 원룸은 이 널따란 서울에서 내가 눈치 안 보고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온열매트를 켠 나는 바닥에 풀썩 드러누웠다. 흙탕물처럼 질척질척한 잠이 밀려오며 어느새 정신이 혼미해졌다.


    “은주야, 박은주...어서 일어나. 이 좋은 날 잠만 자며 보낼 거야?”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흐릿한 눈을 비비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응시했다.


    “...오빠?”

    그였다. 내 첫사랑. 매우 처참한 흑역사 이후 떠올리기조차 싫었던 얼굴이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내게 말을 건넨다.


    “우리 학생 때 자주 가던 거기 기억나지?”

    “응?”


    정신을 차려 보니 LP레코드가 잔뜩 쌓여있는 어느 바에 앉아 있었다. 그와 학생시절 즐겨 찾던 음악카페 겸 술집이다. 아무도 없나 주위를 둘러보는데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한 청년이 홀연히 나타났다.


    “한 잔 하시겠어요? 여긴 크리스마스에만 한시적으로 운영되는 바입니다.”

    “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청년의 얼굴과 어느새 앞에 놓인 메뉴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가 있나요...?”

    “전통주 칵테일이에요. 딱 오늘 하루만 드실 수 있는 메뉴가 있는데 어떠신가요?”

    “에...어떤 술이길래...?”

    “안동소주 베이스에 카시스, 론디아주 151을 배합한 샷 칵테일이죠. 불을 붙여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기엔 그만입니다.”






    안동소주라...취재처 사람들이랑 마셔본 적은 있는데, 그땐 너무 정신없는 상황이라 어떤 맛인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어쨌든 내가 머뭇거리는 동안 청년은 재빠른 손놀림으로 베이스 술을 붓고 순식간에 불을 붙여 내놓는다. 마치 작은 두 개의 촛불처럼 아른거리는 파란 불꽃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직 정식 이름은 없지만 제 나름대로 붙여 본 별명이 있어요. 첫사랑이라고.”

    “첫사랑이요?”

    “론디아주 151은 75도 독주고, 보시다시피 이렇게 불이 붙죠. 술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다음날 고생하시기도 해요. 하지만 독한 와중에도 은은한 단맛이 있는데 카시스가 여기에 상큼함을 더해줘요. 안동소주의 역할은 여기에 안정감을 더해주는 거라고 할까요?”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보니 첫사랑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것도 같다.


    “그런데 이거...마시다 잘못해서 데지 않나요? 불을 꺼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음...손님은 아마 오래 전에 드셔 보셨을 걸요?”


    이 남자는 내 과거를 어떻게 아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대학시절 그와 보낸 첫 크리스마스가 떠올랐다. 첫사랑 그가 나를 난생 처음 가는 양주바로 안내했고 불붙인 잭 다니엘 몇 잔을 겁도 없이 넘기고는 생전 처음 필름이 끊겼던 기억도... 순간 흑역사가 재생되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저...그 기억은...?”

    “첫사랑한테 데였다는 분들 많죠? 하지만 사실은 처음이니 데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닐까요? 뜨겁고 독한 사랑을 훌쩍 삼켜버릴 용기도 그 시절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죠.”


    그 말을 듣자 뜨거운 불에 대한 두려움이 어느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첫 잔을 들이켰다. 뜨겁고, 달콤하면서 쓰디쓴 맛이 목구멍에서 올라왔다. 아프다, 후회된다, 부끄럽다.... 첫사랑이 끝났을 때 들었던 복잡한 감정들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 하지만 다시 그 뜨거운 불을 삼켜보니 생각보다 고통스럽지는 않다. 끈적하고 다소 묵직한 듯한 단맛이 잔향처럼 입안에 남는다. 나는 한 30초 정도 눈을 감고 안동소주의 은은함과 카시스 특유의 베리향을 음미했다. 오래 전 그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곧이어 두 번째 잔을 들이켰다. 아까보다 더욱 풍성하고 복잡한 향이 번지면서 나는 강렬하고도 아련한 충족감에 다시 눈을 감았다.


     


    2018년 12월 25일 오후, 신촌의 한 원룸


    몇 시간이나 잠이 들었던 것일까... 눈을 떠보니 주변은 어둡다. 커튼 탓인가 하고 창밖으로 다가갔다가 바깥도 이미 어두침침해진 것을 확인했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오후 2시다.


    “무슨 꿈이 이렇게 생생하지...”


    그런데 이상하다. 꿈속에서 느꼈던 뜨거운 불 맛과 향기, 약간의 취기가 여전히 남아 있는 느낌이다. 침울한 기분으로 잠들었던 어제와는 달리  조금은 마음이 차분해진 것도 같다. 머리를 흔들어 졸음을 쫓고 보니 배가 고파왔다.


    “먹을 게 어디 없을까?”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찬장을 뒤졌다. 다행히 며칠 전 마트에서 사온 즉석 설렁탕이 눈에 들어온다. 전자레인지에 설렁탕을 넣고 나서 밥솥에 아주 조금 남은 밥을 펐다. 작업과 식사를 동시에 해결하는 상 위에 깍두기를 곁들인 간소한 식사가 차려졌다. 한술 뜨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익숙한 번호다. 받을까 말까 몇 번을 망설였지만 피했다가는 나중에 일이 더 골치 아파질까 싶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것아, 너 손가락이라도 부러졌니? 휴일인데 에미한테 전화 한번 하면 어디 덧나?”

    “아씨...안 그래도 전화 드리려고 했어요. 어제까지 마감 때문에 정신 없었다구요.”

    “퍽이나... 그보다 니 동생 취직시험 보러 올라가는 건 알고 있니?”

    “아, 어디 면접 보나봐요?”

    “언니가 돼서 한다는 소리가...너희 집에서 며칠만 데리고 있어. 내가 반찬이랑 싸보내마.”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대학 졸업 후 1년에 한번 볼까 말까였던 동생이 갑자기 온다니... 지저분한 방과 쌓여 있는 설거지가 새삼 눈에 들어왔다.


    ‘그녀석 또 집에 오면 한바탕 뒤집어 놓을텐데...’


    고등학생 때부터 살림을 도맡아 할 정도로 깔끔쟁이인 동생이 온다니 부담부터 든다. 아...귀찮아... 밥을 먹고 잠깐 산책이라도 나갈까 싶었지만 갑자기 우울해졌다. 냉장고에 가서 소주 한 병을 꺼냈다.


    ‘당분간 혼술도 어렵겠구나...’


    병뚜껑을 따고 한 잔을 원샷했다. 빈속에 갑자기 술이 들어가서인가 순간 어지러워졌다. 조금 전 틀어 놨던 TV 예능프로의 웃음소리가 희미해진다. 어느 순간 나는 밥숟가락을 쥔 채 가물가물 눈을 감았다.


    “.......”

    “....박은혜?”


    원피스 차림에 단발머리를 한 동생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나이는 어리지만 오히려 언니 노릇을 했던 녀석인지라 솔직히 반갑기보다는 부담스럽다.


    “너 나 들볶으려고 서울 온다고 한 거니?”

    내가 다소 퉁명스럽게 말하자 동생은 빙그레 웃었다.

    “아니, 언니랑 술 한잔 하려고...”

    말을 마친 동생은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얼떨결에 끌려가 보니 어젯밤 보았던 바로 그 바였다. 그런데 어두침침했던 어제와는 달리 분위기가 다소 환해진 듯 하다. 여기저기 반짝거리는 전구로 장식돼 있고 한 켠에는 크리스마스 트리도 보인다.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어제 만난 그 바텐더가 모습을 나타냈다.


    “오늘은 두 분이 오셨네요.”

    바텐더의 표정도 왠지 어제보다 한결 밝아 보인다. 어제는 내가 너무 침울해 있었기 때문일까. 메뉴판이 눈앞에 놓여 지고 동생은 크래커에 각종 치즈가 담긴 안주를 주문했다.


    “크리스마스 칵테일 두 잔이면 어떠세요?”

    “네...그걸로 주세요.”    






    下편에서 계속 -














      정세진 anais21@hanmail.net

       술 권하는 유목민.

       낯선 문화, 낯선 술을 찾아 헤매는 농경사회 노마드로 살아가고픈.





  • 해풍과 거친 환경을 이겨낸 인생 같은 맛

    #제주 #감귤주 #혼디주



    해풍과 거친 환경을 이겨낸 인생 같은 맛







    #제주 #과실주 #감귤 #혼디주





    제주도 음식 하면 돼지고기나 옥돔, 혹은 최근 인기를 끌기 시작한 고기국수 등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오늘날 유명해진 ‘관광지’ 메뉴일 뿐이다.


    농사 짓기 힘든 제주 땅에서 곡물은 매우 귀했고, 질 좋은 특산물은 중앙 정부에 바쳐야 하는 그림의 떡이다 보니 제주 음식의 역사에는 온통 ‘짠내’가 묻어난다.


    제주에서 발달해 온 술만 보더라도 당시의 거칠었던 환경을 짐작할 수 있다. 대표 전통주 중 하나인 오메기술은 관광 상품인 오메기떡을 재료로 한다. 원래 이 떡은 간식이 아니라 술을 빚기 위한 목적으로 쌀보다 구하기 쉬운 좁쌀을 갈아내 반죽하고, 팥소나 팥고물도 없다.


    도수 낮은 막걸리와 유사한 쉰다리는 쉰 쌀밥이나 보리밥을 하루 이틀 발효시킨 것으로, 상한 밥도 어떻게든 재활용하고자 만들어진 음료이다.  


    그런가 하면 동물성 재료인 게를 술 재료로 이용하기도 했다. ‘깅이(제주 방언으로 게)술’은 증류주에 작은 게를 담근 것으로 나이가 들면 관절이 쑤시게 마련인 해녀들이 보양을 위해 마셨다고 한다.


    제주도를 흔히 돌, 바람, 여자가 많은 삼다도라고 부른다. 얼핏 낭만적으로 들리기 쉽지만 알고 보면 돌 때문에 농사 짓기가 힘들고, 남자들이 바닷일을 나갔다 태풍으로 죽다 보니 과부가 많다는 자조적 의미이다.


    제주 여성들은 인구 이탈을 막기 위해 평생 고향을 떠나지 못했으며, 남녀가 생업에 함께 뛰어들어야 하는 것도 모자라 전국에서 유일하게 군역까지 져야 했다.


    하지만 그만큼 이곳의 여성들은 강인하게 살아나갔고, 개중에는 남자들도 해내지 못한 큰 업적을 이룬 인물인 김만덕을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양인 신분으로 태어나 한때 가난 때문에 기적에 오르기도 했으나 특유의 수완을 발휘, 특산물을 본토에 내다 파는 객주로 큰 재산을 축적했다. 1795년 태풍으로 기근이 찾아오자 본토에서 500섬의 쌀을 사와 1100여명을 구휼하면서 전국에 그 이름이 알려졌다.


    정조 임금이 소원을 묻자 “대궐과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다”고 한 그녀는 기생 출신의 양인 여성으로서는 전례 없이 왕을 알현한 선각자이며 여장부로 오늘날까지 기억된다.  


    김만덕이 본토에 팔아 이문을 남겼던 귤은 제주를 대표하는 농산물이면서 왕에게 진상되는 귀한 과일이었다. 그러나 귤나무는 접붙이기로 번식하다 보니 재배가 쉽지 않고, 잦은 태풍에 1년 농사를 망치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pixabay




    오늘날 우리가 맛보는 제주 귤은 지속적인 품종 개량과 이를 위한 농민들의 피나는 노력, 그리고 험한 제주의 해풍 등 수많은 고난을 이겨낸 결과물인 셈이다.


    제주도에서도 최남단에 속하는 서귀포 신례리에서는 해풍을 받고 더욱 단맛이 강해진 귤을 재료로 새로운 전통주 ‘혼디주’가 만들어지고 있다.


    혼디주는 감귤 그대로의 맛을 살리기 위해 가열 농축액이 아닌 직접 착즙한 생즙만을 사용한다. 여기에 자체 개발한 효모를 넣어 발효시키는데, 병 하나 당 감귤 3개가 들어간다고.


    제주 천연 화산암반수와 향긋한 감귤이 빚어낸 혼디주는 도수 12도 정도로 와인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설탕이 첨가됐다고 해서 다소 달지 않을까 했으나 생각보다는 단맛이 적고 부드럽다.


    천연 효모가 내는 다소 쿰쿰한 향에 매력 있는 산미가 신선한 해산물과 잘 어울린다. 특히 고등어나 방어 등 겨울 제철 생선회의 비릿한 맛을 잡아 주는 데 제격이다.



    (주)시트러스 공식 홈페이지




    혼디주라는 이름은 제주 방언으로 ‘함께’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름에 걸맞게 혼디주는 개인 소유가 아닌 신례리 지역 공동체에서 함께 운영되는 양조장에서 생산된다.  


    오래 전 제주 땅의 고아 소녀였던 김만덕을 역사에 길이 남을 여걸로 키운 힘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넘어서는,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는 공동체에 대한 믿음에서 나왔을 것이다.


    혼디주에는 살짝 찌르는 듯한 신맛에 쓴맛도 느껴지는데, 동시에 이를 부드럽게 감싸 주는 은은한 단맛과 감귤 특유의 향, 그리고 제주 바다의 향기가 함께 들어 있다.


    조선판 걸크러시 김만덕을 떠올리며 ‘혼술’ 하기 에도 좋지만, 올 연말 보고 싶었던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 그 맛이 두 배가 될 듯 하다.    
















      정세진 anais21@hanmail.net

       술 권하는 유목민.

       낯선 문화, 낯선 술을 찾아 헤매는 농경사회 노마드로 살아가고픈.






  • 오미자가 주는 다섯가지 즐거움

    #오미자 #오미자탁주 #오희



    오미자가 주는 다섯가지 즐거움







    #오미자 #오미자탁주 #오희 #빨간술 #문경주조





    조선 21대 임금 영조는 집에서 술을 빚은 무관을 남대문에서 공개 참수할 정도로 엄격한 금주령을 내렸다. 그런데 우습게도 궁궐에서 영조 자신이 몰래 술을 마신다는 소문이 돌았고, 신하들이 이에 대해 묻자 “오미자차를 마셨을 뿐”이라며 변명했다고 한다.



    다만 일설에는 왕의 체신을 지켜주기 위해서인지 영조가 마셨던 음료가 오미자주가 아닌 생맥산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생맥산은 오미자에 맥문동, 인삼, 황기, 감초 등을 달여 시원하게 마시는 음료로 동의보감에는 “사람의 기를 도우며 심장의 열을 내리게 하고 폐를 깨끗하게 다”고 기록되어 있다.



    달고, 쓰고, 시고, 맵고, 짠 다섯 가지 맛이 난다는 오미자에는 혈류 개선, 고혈압 및 심혈관 질환 예방, 당뇨 예방, 원기 회복 등의 효과가 있으며 간기능과 호흡기에도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어쨌든 금주령을 내린 임금이 신하들 몰래 마실 만큼 오미자주는 향기롭고 맛이 좋았던 것 같다.




    플리커




    고려 말과 조선 초의 학자인 권근은 오미자를 소재로 시를 쓰기도 했다.






    어두운 눈을 맑게 해주고

    마른 목을 촉촉하게 해주며

    막힌 가슴을 씻어주는 데다가

    마시면 양쪽 겨드랑이에 바람이 든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오미자는 특히 품질이 좋고 살이 많으며 새콤달콤한 맛이 살아 있어 중국에 가는 사신들이 각종 하례 행사 선물로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다. 말린 오미자를 우린 연분홍 빛깔의 물은 시각적으로 보기 좋아 거의 모든 화채류에 빠지지 않고 들어간다.오미자 물을 차갑 게 식혀 각종 고명을 띄워 내는데 계절에 따라 진달래, 보리알, 배, 장미꽃, 앵두 등이 들어가며 녹말 반죽을 국수처럼 채 썰어 넣는‘화면(꽃국수)’도 있다.



    열매 외에 뿌리에도 약효가 있어 조선 중기 정치인이자 문장가인 윤두수는 지인인 최흥원에게 한시를 지어 오미자 뿌리를 구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오래도록 상공의 약상자에 의지하였으니

    무슨 마음으로 인삼 백출로 효험을 보리이까

    깊은 가을에 홍단자가 생각나서

    오미자 신령한 뿌리 몇 떨기를 빌립니다





    오미자에는 로맨틱한 전설도 전해져 내려온다. 음력 7월 7일 칠석날 견우와 직녀가 만날 때 까마귀와 까치들이 오미자 덩굴을 물어다가 오작교를 만들었다는 것.



    이처럼 맛과 영양이 뛰어나며 풍류도 함께 겸비한 오미자는 술을 빚어도 적당한 산미와 단맛이 어우러져 고급스러운 느낌이 든다. 전통 방식의 오미자주를 빚을 때는 우선 멥쌀로 고두밥을 지어 식혔다가 누룩과 물을 부어 발효시킨다. 이것을 소주고리로 증류하는데 고리 끝에 헝겊을 묶어 증기가 내려오는 곳에 오미자를 두와 맛과 향이 배도록 하는 것이다. 오늘날 가정에서 만들 수 있는 오미자주는 소주에 오미자를 넣고 밀봉한 다음 10일 후 개봉해 여과지에 붓고 설탕을 넣는다. 1개월이 지나면 적갈색의 약술이 된다.



    보다 간단하게 만들려면 오미자청을 마시고 남은 찌꺼기에 소주를 부어 3개월 익히는 방법도 있다. 다만 이렇게 만든 오미자주는 의외로 도수가 높아 단맛에 홀짝홀짝 마시다가 ‘훅 가는’ 수가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대학시절 필자는 집에서 담근 오미자주를 몰래 조금씩 떠 마시다 취해 엄마의 등짝스매싱을 맞은 기억이 있다.





    문경주조 공식홈페이지





    비교적 최근에 나온 오미자 전통주로는 막걸리를 베이스로 만든 ‘오희’가 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공식 만찬주로 유명세를 탄 오희는 일반 막걸리보다 맑고 투명하며 2차 발효 때 오미자를 첨가해 선홍색이 또렷하게 살아 있다. 도수 8.5%의 오희는 톡 쏘는 탄산이 청량감을 주며, 단맛이 적고 적절한 산미와 오미자 특유의 은은한 스파이시향이 난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술꾼들에게 권할 법 하며 맛이 산뜻해 기름진 안주와 궁합이 좋다.



    '오미자주에는 강장, 무기력, 식욕 증진 등의 효과가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술이니 적당히 마시고 과음은 피하도록 하자.











      정세진 anais21@hanmail.net

       술 권하는 유목민.

       낯선 문화, 낯선 술을 찾아 헤매는 농경사회 노마드로 살아가고픈.







       

      EBS 꿈을 JOB아라
      [우리술스토리텔러 주령사]

    • 한국술 전문 스토리텔러라는 새로운 직업으로,
      '주령사'가 'EBS 꿈을 JOB아라' 방송에 2019년 1월 14일 소개되었습니다.

      맛있고 가치 있는 한국술들이 국내와 해외의 대중들에게 더 많이
      알려지고 사랑받을 수 있도록, 주령사와 술펀은 앞으로도 늘 노력하겠습니다.

      [술다방] 1만원에 막걸리 무한흡입

      기간 : 2018.10.01 ~ 2018.10.31

    • 을지로 술다방에서 평일 저녁 5시부터 7시까지
    • 바로가기

      술펀 클래스 같이 듣자!

      기간 : 2018.09.01 ~ 2018.09.30

    • 술펀 클래스 2인이상 동반 신청 시 우리 막걸리 1병 증정
    •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