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툰 by 미깡

미깡이 읽어주는 술은 어떤 맛일까?

탁주에 빠진 미깡이 들려주는 술 이야기


블루베리 막걸리

‘달콤하고 산뜻한 여름의 맛’

술 만화에 이어 해장 에세이까지 쓰고 나니 ‘본 투 비 술꾼’ 이미지가 굳어졌는지, 어딜 가나 술과 관련된 질문을 받는다. 특히 “주량이 얼마인지”와 “가장 좋아하는 술은 뭔지” 질문은 빠지지 않는다. 예전 인터뷰들을 죽 훑어보니 거기에 대한 내 대답은 한결같이 “소주와 맥주”였다.

남의 이야기인 듯 잠깐 어리둥절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입맛도 몸의 사정도 일상의 패턴도 바뀌어서 요즘 나는 희석식 소주와 맥주는 거의 마시지 않는다. 와인과 막걸리를 마신다. 오늘은 술 좀 마시겠다고 굳이 마음먹는 게 아니라, 취할 때까지 퍼붓는 게 아니라, 일과를 마치고 식탁에 털썩 앉아 배를 채우고 목을 축이는 식으로 마시는 것이다.

“일주일에 몇 번이나 마시냐”

는 물음에 1초도 뜸들이지 않고 “주 6일 마신다”고 답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가벼운 반주(와인), 식사 대용(막걸리) 포함해 6일이니 거짓말은 아니지만 짐짓 허세를 부리는 건 맞다. 다음날 해장을 해야 할 정도로는 마셔줘야 음주로 쳐준다면, 내 음주는 주 2회 정도? 나머지는 그냥 밥이고(막걸리), 물이다(와인). (물에 밥을 말아먹지는 않는다.)

‘아, 맞다! 내가 그랬었지!’

막걸리가 좋은 건 첫째, 배가 불러서다. 그걸 단점으로 꼽는 사람은 안주를 대차게 먹을 생각이겠지만 나처럼 ‘데일리’로 마시고, 내 안주 내가 차려야 하는 사람에게는 이보다 큰 장점이 없다. 안주를 매번 거창하게 준비할 것 없이 냉장고에 있는 밑반찬 몇 개만 꺼내면 되기 때문이다. 두부 살짝 데쳐서 젓갈이나 김치를 곁들이면 훌륭한 안주가 된다. 반찬가게에서 3천원짜리 ‘나물무침 3종’ 하나 사오면 비빔밥 한 번, 안주 한 번이 딱 떨어진다. 그렇게 먹다가 어느 날 비가 오거나 하늘이 꾸물거린다 싶으면 얼씨구나 하고 전을 부쳐 먹는다. 안주가 아무리 맛있어도 막걸리 한 병을 마시다 보면 배가 불러서 많이 먹지는 못한다. 과음을 하려야 할 수도 없으니 다음날 몸에 무리가 없다. 내일 술을 또 마실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막걸리가 좋은 건 맛있어서다.

100 종류의 막걸리가 있다면 100가지 맛이 다 다르겠지만, 입에 쓰지 않고 목넘김이 부드럽다는 특징은 막걸리인 이상 100개 공통일 것이다.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삼킨다는 게 좋다. 맛있자고, 기분 좋자고 마시는 술인데 어째서 찡그려야 하느냐 말이다. 쌀맛이 묵직하고 누룩향이 짙은 전통적인 막걸리는 그 맛 자체를 곱씹듯이 음미하는 즐거움이 있고, 탄산이 톡톡 쏘고 산미가 강한 막걸리는 그에 어울리는 안주를 고안해서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안주가 꼭 한식이어야만 할까? 짭쪼롬한 페퍼로니 피자와 새콤한 막걸리의 조합은 물개박수를 절로 부른다.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드셔 보시기를!)

특별한날을 위한 기다림

여하간 그때그때 안주에 따라, 기분에 따라, 또는 계절에 따라 여러 막걸리를 맛보고 즐기던 중, 블루베리 막걸리 한 병을 얻게 되었다. 몇 년 전, 고려왕실의 술로 유명한 아황주를 상당히 인상깊게 마셨던 기억이 있는데, 그 아황주를 빚은 술도가에서 새로 만든 유기농 탁주라 했다. 아담한 사이즈에 술의 빛깔은 예쁜 연보라. 직감이 발동한다. 이것은 데일리가 아니다. 특별한 날 따야겠다! 안주, 기분, 상황. 이 녀석이 딱 어울리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냉장고에 넣어 놓고 가만히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작년 여름에 세 식구가 블루베리 농장에 갔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농장…은 절대 아니고 실은 블루베리 나무를 십여 그루 심어 놓은 지인의 시골집 텃밭이었다. 하지만 내가 체감하기로는 1천평 농장에 다름아니었다! 나무들의 키가 나만큼 작아서 만만히 봤는데 가지마다 열매가 엄청나게 달려 있어서 따도 따도 끝이 없었다. 애당초 우리가 가게 된 이유도 그거였다. 블루베리가 잔뜩 열렸는데 일손이 없으니, 제발 좀 따서 전부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많아봤자’라고 생각하고 썬캡 따위를 챙기지 않은 아침의 내가 원망스러웠다. 본인이 다 딸 거니까 맡겨만 달라고 큰소리 빵빵 치던 여섯 살 딸은 한 줌인가 따고 나서는 “너무 덥네?” 하더니 그늘에서 물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땡볕 아래 서서 땀을 줄줄 흘리고, 욕도 슬쩍슬쩍 흘리면서 고독하고 고생스럽게 블루베리를 땄다.

커다란 김치통을 가득 채우고서야 작업은 끝이 났다.

여름 내내 그 블루베리를 먹는 동안 딸은 ‘내가 딴 거~’라고 생색을 냈고 그때마다 나는 눈을 흘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블루베리는 맛있었다. 과육을 깨물 때의 첫 맛은 새콤하고 삼킬 때의 뒷맛은 달콤한데, 두 맛이 과하지 않고 은근해서 과일을 잘 먹지 않던 나도 이 블루베리만큼은 좋아하게 되었다. 건강과 미용에도 좋다지만, 살림하는 입장에서 보면 간단히 헹구기만 하면 되고, 끈적한 과즙이 흐르지도 않고, 무엇보다 껍질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이렇게 깔끔하고 우아한 과일이 또 어디 있을까. 철이 지나 겨우내 못 먹고 있다가 이제 곧 여름이 되면 양껏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침이 고이던 차에, 블루베리 막걸리가 손에 들어온 것이다.

블루베리X막걸리라니, 좋은 것X좋은 것 아닌가!

더구나 과실 농축액이나 색소 같은 걸로 흉내만 낸 게 아니라 양조장에서 직접, 나무 주걱으로 블루베리 청을 쑤어서 넣었다고 하니, 기대감에 몸이 달 수밖에 없었다. 이 술을 따게 될 ‘좋은 날’을 오매불망 기다렸다.

‘그날’은 갑자기 찾아왔다.

나의 가장 오랜 친구가 어느 토요일 낮에 우리집을 찾았다. 최근 맘고생이 심하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마치 분장이라도 한 듯이 볼이 세로로 홀쭉해져 있는 걸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친구는 동업자와 마음이 맞지 않아서 수 년 간 애정을 쏟았던 사업을 끝내 정리하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는데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식탁에 마주 앉아 낮술을 시작했다. 이것저것 계통 없는 음식들을 늘어놓고 칠링해 둔 와인을 땄다. 친구는 애써 힘을 내 웃어 보였지만 수심을 아주 지우지는 못했다. 와인 두 병을 천천히 비우는 동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나는 이윽고 냉장고 안쪽에서 블루베리 막걸리를 꺼냈다. 입술이 얇은 사발을 찾아서 조심스럽게 술을 따르자, 잔을 채운 보랏빛 때문에 식탁 위가 한결 밝아진 듯했다. 친구와 나는 꼭 두 잔씩 나눠 마셨다. 입 안에서 그 맛을 음미하며 조금씩 조금씩 삼켜봤다.

지난 여름의 블루베리처럼 은은하게 새콤했고 은은하게 달콤했다.

친구는 짧게 “맛있다.”고 한 마디 했을 뿐이지만 그 표정이 아까보다 말갛고 밝았기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했다. 힘들고 지쳤을 때 나를 찾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 그 친구와 낮부터 퍼져 앉아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꽤 잘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마침 맛있는 술이 있어서 맛있게 나눠 마셨으니 이 이상 더 ‘좋은 날’이 어디 있겠는가? 아껴 둔 술을 꺼내도 전혀 아깝지 않은 친구가 있어서, 참 다행이고 좋다. 나는 작년에 땡볕 아래서 블루베리를 따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딸이 어떻게 나를 배신을 했는지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고 친구는 조금 더 크게 웃었다.

미깡의 첫번째 Pick :: 블루베리 막걸리 | 최행숙전통주가

One thought on “술툰 by 미깡

  1. 2020 댓글:

    다음편도 기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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